스티븐 샤핀, 한영덕 역 <과학혁명>(영림카디널, 2002)
과학혁명에 대한 저명한 저작 중 한 권인 <과학혁명>을 읽었다.
훌륭한 책. 번역은 나쁘진 않지만 아쉽다. 영어식 표현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자칫하면
한국 독자들이 오해할 수도 있는 구석들이 종종 등장한다. 뭐 그렇지만 크게 오역이 있다든가
하는 차원은 아니니, 일독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겠다. 그러나 샤핀의 견해를 숙고하고
싶다면 원서로 읽어야 할 듯하다.
"과학혁명 같은 것은 없었다. 이 책은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다."(9)
이것이 서론 첫머리다.
과학혁명에 대한 (역설적이게도) 꽤나 비과학적인 통념, 특히 과학자들이 만들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확신되곤 하는 그런 통념에 대한 튼실한 비판이요, 소위 과학혁명기에 대한 재구성이다.
특히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갈릴레오 연구> 등을 위시한 고전적 저작들에 대한 비판이 강렬하다.
나는 요즘 <갈릴레오 연구>를 읽고있는데,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읽은 게 꽤나 유용하다.
핵심적인 논제 한 가지만 거론한다면, 기계론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다.
기계론은 근대과학의 핵심으로 인정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실은 르네상스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는 중대한 계기기도 했다는 것.
예컨대, 근대 과학자들의 기계론은
한편으로는 르네상스 자연주의를 비판하는데,
이 자연주의는 핵심적으로 만물에 힘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근대 기계론자들은 이를 비판하는데, 그러므로 물질은 철저히 수동적인 것으로 기술된다.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러나 이 물질에는 수동적인 물질(현대의 물질관과 동일한)
이자, 그러므로 (이 세계의 역동적인 운행과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끊임없는 개입이 요청된다.
그러니까 물질의 운동은 수동적인 물질이라는 재료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다.
이들은 물질에게 힘을 부여하는 흐름을 자연주의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는 점에서 현대 기계론과
동일히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개입을 필연적으로 요청했다는 점에서 현대 기계론과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헌데 과학사는 이 뒷부분을 제외하고 앞부분만을 강조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뉴턴의 만유인력 과학은 사실 당시 기계론자들이 기계론적 자연철학에 정반대된다
해서,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만유인력 같은 신비로운 힘을 핵심 원인으로 상정하는 이론이 어떻게 과학적인 이론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등, 상식적인 기계론자들의 반박이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뉴턴의 과학에는 수학을 핵심으로 한다는 특징으로 인해,
현대 과학의 핵심과 상통하게 된다.
결국 현대 과학에서도, 관찰이나 경험보다는 만유인력과 수학이 핵심이 되게 되는 것이다.
관찰이나 경험만으로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관찰과 경험에서 출발하된, 필연적인 인과관계는 인력과 수학을 통해 정립하며,
그 결과를 수많은 관찰과 경험과 부합시켜나가는 과학의 원형이 창조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고 샤핀 식으로 보자면, 이런 노선이 확립된 것은
17세기 이후 한참 뒤의 일이며, 그런 연후에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마치 17세기에 그런 과학개념이 확립된 것처럼....
과학혁명에 관한 다른 저작들을 좀 더 읽어가면서 소위 과학혁명에 대한 숙고를 계속하기로 한다.
파이어아벤트, 코이레, 쿤의 고전적 저작과, 최근 출간된 토머스 헨킨스, 피터 디어 등의 저작이 그것이다.
과학혁명에 대한 저명한 저작 중 한 권인 <과학혁명>을 읽었다.
훌륭한 책. 번역은 나쁘진 않지만 아쉽다. 영어식 표현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자칫하면
한국 독자들이 오해할 수도 있는 구석들이 종종 등장한다. 뭐 그렇지만 크게 오역이 있다든가
하는 차원은 아니니, 일독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겠다. 그러나 샤핀의 견해를 숙고하고
싶다면 원서로 읽어야 할 듯하다.
"과학혁명 같은 것은 없었다. 이 책은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다."(9)
이것이 서론 첫머리다.
과학혁명에 대한 (역설적이게도) 꽤나 비과학적인 통념, 특히 과학자들이 만들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확신되곤 하는 그런 통념에 대한 튼실한 비판이요, 소위 과학혁명기에 대한 재구성이다.
특히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갈릴레오 연구> 등을 위시한 고전적 저작들에 대한 비판이 강렬하다.
나는 요즘 <갈릴레오 연구>를 읽고있는데,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읽은 게 꽤나 유용하다.
핵심적인 논제 한 가지만 거론한다면, 기계론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다.
기계론은 근대과학의 핵심으로 인정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실은 르네상스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는 중대한 계기기도 했다는 것.
예컨대, 근대 과학자들의 기계론은
한편으로는 르네상스 자연주의를 비판하는데,
이 자연주의는 핵심적으로 만물에 힘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근대 기계론자들은 이를 비판하는데, 그러므로 물질은 철저히 수동적인 것으로 기술된다.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러나 이 물질에는 수동적인 물질(현대의 물질관과 동일한)
이자, 그러므로 (이 세계의 역동적인 운행과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끊임없는 개입이 요청된다.
그러니까 물질의 운동은 수동적인 물질이라는 재료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다.
이들은 물질에게 힘을 부여하는 흐름을 자연주의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는 점에서 현대 기계론과
동일히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개입을 필연적으로 요청했다는 점에서 현대 기계론과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헌데 과학사는 이 뒷부분을 제외하고 앞부분만을 강조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뉴턴의 만유인력 과학은 사실 당시 기계론자들이 기계론적 자연철학에 정반대된다
해서,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만유인력 같은 신비로운 힘을 핵심 원인으로 상정하는 이론이 어떻게 과학적인 이론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등, 상식적인 기계론자들의 반박이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뉴턴의 과학에는 수학을 핵심으로 한다는 특징으로 인해,
현대 과학의 핵심과 상통하게 된다.
결국 현대 과학에서도, 관찰이나 경험보다는 만유인력과 수학이 핵심이 되게 되는 것이다.
관찰이나 경험만으로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관찰과 경험에서 출발하된, 필연적인 인과관계는 인력과 수학을 통해 정립하며,
그 결과를 수많은 관찰과 경험과 부합시켜나가는 과학의 원형이 창조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고 샤핀 식으로 보자면, 이런 노선이 확립된 것은
17세기 이후 한참 뒤의 일이며, 그런 연후에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마치 17세기에 그런 과학개념이 확립된 것처럼....
과학혁명에 관한 다른 저작들을 좀 더 읽어가면서 소위 과학혁명에 대한 숙고를 계속하기로 한다.
파이어아벤트, 코이레, 쿤의 고전적 저작과, 최근 출간된 토머스 헨킨스, 피터 디어 등의 저작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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